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쟁쿠르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헨리 5세는 10,000여 명의 병력으로 8월 프랑스를 침공, 항구도시 [[아르플뢰르 공방전]]에서 많은 병력과 시간을 들여 9월 22일 항복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또한 이후 기록을 보면 무리한 공성전 속행으로 인해 최소 20% 최대 '''40%'''가량의 병력 사망 및 군내 전염병 창궐, 물자 부족 등 여러 난점에 맞딱뜨린 상황이었다.] 잉글랜드군은 아르플뢰르를 벗어나 프랑스 북부의 잉글랜드 거점인 [[칼레]]로 퇴각하려고 했다. 프랑스는 연락을 받는 대로 병력을 모집했으나 이들의 지원이 오기도 전에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자 그들이 칼레에 돌아가 세력을 회복하기 전에 빨리 섬멸시키고자 했다. 헨리는 처음에는 증조부인 [[에드워드 3세]]가 한 것처럼 블랑슈타크라는 이름의 여울목을 통해 솜 강을 건널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를 예상한 샤를 달브레가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길목을 미리 선점했다. 잉글랜드군은 청야전술로 황폐화된 강변의 마을들을 따라 4일을 더 행군했지만 도하 지점을 찾을 수 없었고, 남쪽으로 행군 방향을 틀어서 프랑스 수비군의 감시 범위를 일시적으로 벗어난 다음 그 짧은 틈을 노려 도하 지점을 찾는다는 도박 같은 작전 끝에 결국 기적적으로 수비군을 따돌리고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10월 24일, 강을 건너느라 낭비한 시간을 보충하기 위한 4일간의 강행군 끝에 잉글랜드군이 마주한 것은 칼레로 향하는 좁은 계곡 너머의 도로와 평지를 가득 채운 '수많은 메뚜기 무리 같은' 프랑스 군대였다. 프랑스군이 칼레로 향하는 길목의 요충지를 선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잉글랜드군에는 전투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잉글랜드 진영에 머무르고 있던 부르고뉴인 르 페브르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헨리는 침착하게 전투 준비를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죽음을 예감하고 군종사제들을 찾아가 고해를 시작했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지휘관인 '부시코' 장 르 맹그르 2세와 샤를 달브레는 계곡 너머에 주둔한 잉글랜드군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 대치 상태를 유지한 채 후속 부대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은 경험 많은 군인이었고, 잉글랜드군은 이미 며칠 전의 기습적인 도하 작전을 통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의 결단력을 충분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투 대열을 유지한 채 대치하는 동안 밤이 찾아왔고, 잉글랜드군은 잠도 자지 못하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밤을 보냈다. 헨리 5세는 불리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추격군이 늘어날 것임을 인지하고 안그래도 많은 프랑스군이 더 많아지기 전에 결전을 벌이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샤를 달브레의 시간벌이용 수작도 무시하며 다음날 이들을 맞아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